저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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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프트: 배신당한 남자들
  • 작성일2024/04/0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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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손희정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가 거센 파도를 일으킨 지 어느덧 10년이 되어 가는 시점이다. 하지만 과연 세상은 그만큼 더 나아졌을까?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저널리스트인 수전 팔루디가 1991년 ‘백래시’라고 명명한 남자들의 반격은, 2024년 현재 한국의 정치·사회·문화적 지형에서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스티프트: 배신당한 남자들』은 1999년 처음 세상에 나온 뒤 2019년 20주년 기념판이 출간된 수전 팔루디의 대표작이다. 시기적으로는 이미 국내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백래시』와 『다크룸』 사이에 위치하며,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신화를 불식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책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중요한 책이다. 앞서 『백래시』 한국어판 해제를 집필하고 『다크룸』을 우리말로 옮긴 문화평론가 손희정의 번역으로 ‘팔루디 연작’의 주요 저작 세 권이 국내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이 책에서 팔루디는 “아버지들이 물려준 세상에, 남성성이라는 신화에 배신당한(stiffed) 남자들은 어째서 여성들에게 분노할 뿐 사회에 저항하지는 않는가”라는 질문 아래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남성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6년여에 걸친 방대한 취재와 인터뷰를 기반으로 역사학·사회과학·심리학 등을 넘나들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펼쳐 나가는 이 방대한 르포르타주는,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 없이 흘러가다가 어느새 지금 우리의 질문과 맞닿게 될 것이다.

역자후기
팔루디는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고개 숙인 남자’ ‘남성성의 위기’ 판타지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6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신자유주의 아래 미국—모든 견고한 것이 자본주의 매트릭스 안으로 녹아들어 가고, 모든 것이 이미지 상품으로 전환돼 버리는 영토—을 살아가는 남자들이 느낀 환멸과 방향감각 상실을 조사한다. 그리하여 밝혀진 사실은, 1990년대 미국 남성들이 경험한 혼란이 결국 제2차세계대전 이후 풍요의 시대에 만들어진 남성성 신화와 그 좌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들을 배신한 것은 다름 아닌 전후 미국 사회의 가부장주의적 자본주의였다. 이 책 제목이기도 한 ‘스티프트(stiffed)’, 즉 배신당한 남자들이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했다. (…)
미국에서 브로플레이크(broflake, 자신과 다른 의견을 만났을 때 쉽게 화가 나는 청년 남성들)가 등장하고 트럼피즘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와 맞물려 한국에서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내건 보수당 당대표와 대통령 후보가 등장했다. 안티페미니즘 백래시를 의제로 삼은 정치인들이 그 목소리를 정치 세력화하면 언론에서 그것이야말로 대의라며 떠들어 대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우리가 똑똑히 보게 된 것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성을 ‘숏컷이니까 페미니스트’라며 폭행하는 남성의 등장이었다. 물론 이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2023년 한국에서 이른바 ‘인셀 범죄’에 해당하는 칼부림 사건이 가시화됐다는 점은 확실히 주목할 만하다. 미국에서 인셀이 등장하는 데 바탕이 되었던 것, 즉 “틀에 박힌 남성성을 구현한, 완전히 전능한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관념”과 그로부터 탈각됐다는 불안 및 자포자기의 정서는 탈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티프트』라는 미국 현대 남성성의 원초경을 따라가면서 『파이트 클럽』의 ‘무명씨’가 어떻게 2014년의 엘리엇 로저(미국 인셀 범죄의 상징적인 인물)가 되고, 엘리엇 로저는 어떻게 2023년 대한민국 신림동에서 벌어진 칼부림 사건과 만나게 되는지, 그 이해의 폭을 연장하고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